이명인 지음.
1960년 전주 출생.
상명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1992년 <현대 소설>에 '먼 하늘 가까운 사람들'
발표하며 등단.
빼앗긴 들의 사람들,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생각,
아버지의 우산,
집으로 가는 길,
치즈, 낙타, 은밀한 유산
'사랑 참 어렵다, 많이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소설가 이명인 이 찾아낸 서툰 사랑,
더딘 사랑, 아픈 사랑...
그러나 지독하게 아름다운 사랑
사랑은 그저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다.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쓸쓸하고 힘겹기도 하며,
넘어져 깨진 생채기처럼 쓰리고 아프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걸 걸지 못하고
시린 사랑을 한 루 살로메를 보면 그렇고,
사랑하지만 일정한 거리 밖에서
연인의 등만 바라보아야 했던
캐서린 햅번 또한 그렇다.
하지만 60여 년을 함께 살고도 여든둘의 아내에게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다고
고백하는 앙드레 고르,
사랑은 쉬워서 하는 게 아니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다고 한 로봇 브라우닝,
평생 처음처럼 변함없이 애틋하게 살아간
박수근 부부의 가슴 먹먹한 사랑에
우리는 다시 또 사랑할 힘을 얻는다.
이 책에는 이런저런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히 가슴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사랑도 있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평생 숨죽인 사랑도 있으며,
간절히 원했지만 슬픈 이별로 끝난 사랑도 있고,
저들은 좋았으나 주위 사람에게
상처를 준 아픈 사랑도 있다.
사랑한, 사랑하고 있는, 사랑할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그 어떤 모습이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되길 ···.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지 마라.
모든 운명이 아름다운 게 아니듯이
운명적 사랑 역시 그렇더라.
지구를 통째로 들어 올릴 게 아니라면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랑은 하지 마라.
자기 가슴에 두 배의 비수가 꽂히더라.
사랑도 결국 사람 사는 일의 일부더라.
비 오는 이른 아침,
따스한 불빛의 쇼윈도 안에서
풍기는 빵 냄새처럼 뭇사람도
덩달아 행복한 그런 사랑이 하기도 좋고, 보기도 좋더라.
이런 나의 말은 온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따스한 밥 한 사발도 되고,
화려한 만찬도 되는 숱한 사랑을 들여다보았으면서도
난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사랑이 와도 식은 잿밥처럼
멀뚱해질 날도 있으리니.
1. 사랑에 빠져들다.
사랑은 가로막는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짐해서 잊히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게
가난과 재채기와 사랑이라 하지 않았나.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이 경험하는
설렘과 낯섦도 실은 거리감 때문이다.
너무 밀착되어 상대방의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 욕망은
많은 불화를 낳기도 한다.
반대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 때문에 좌절하기도 한다.
'거리'는 좁혀지거나 멀어지며
긴장과 갈등을 우발하는 요소가 된다.
너무 가까우면 답답하고,
너무 멀면 의심과 불안으로
자멸하고 만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천 리의 거리감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천 리를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의 밀착된 정서로 행복해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거리감은
의외로 조절하기 힘든 숙제다.
거리감은 소유욕과 맞물린다.
상대에게 가장 많이 줄 수 있는 것은 빈손이다.
빈손을 내밀면 거기 따뜻한 체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다정함이 있다.
사랑 역시 내가 무언가를 많이 이루고
가져야만 오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비어 있는 어깨가
사랑스러울 수 있다.
도대체 사랑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물러나고 양보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라는 한계에 있지 않다.
그저 이해하면 된다.
사랑과 이해가 만났을 때 가장 아름다운 날개가 된다.
이해가 없는 사랑은 쉽게 다친다.
2. 사랑 참 어렵다,
많이 힘들다.
막 시작하는 사랑은 사랑의 불로
서로의 온 인생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 역시 연료가 필요하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탈 수 없다.
때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으로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고 믿는다.
사랑이 있으므로 그 어떤 장벽도
다 넘을 듯 용감하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빈부 차이도 없고,
심지어 성의 차별도 없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행복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이어질 줄 알았던 사랑이
어느 날 문득 장벽이 된 걸
발견하고 절망한다.
사랑과 자유는 얼핏 무관한 것 같지만,
현실에선 대단히 밀접한 관계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사랑과 자유는
반비례인 경우도 많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내 시야에 두고, 울타리 안에 가둔다.
심지어 사랑의 목줄은
의외로 짧아서 짧은
열정의 시간이 지나면
잡혀 버둥거리게 된다,
사랑이라 믿었던 그것에.
가득 찬 그릇에 더 넣으려 하면,
억지로 구겨 처넣다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사랑 역시 채워져 있는데 넣으려 하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구기거나
상처를 주거나 버려야 한다.
구김을 주는 것 역시 구겨지고,
상처를 주는 것 역시 상처를 받지 않고는
그 그릇에 담길 수 없다.
때로 그릇이 깨지기도 한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턱 선이 무뎌지고
피부에서 윤기가 가시는 것을
함께 겪으며 사는 일,
새 물 내 나는 옷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맞춰지듯
사람 역시 그렇게 되어가는
그 과정들은 소중하다.
3.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간도 내주고
쓸개도 내줄 수 있지만,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건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삶의 많은 부분을
이인삼각으로 함께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인삼각 걷기는
의외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보다는
사랑의 결과물과 할 때가 많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인삼각으로 함께 삶을 꾸려간다.
문제는 나에게는 너무 긴 끈이
상대에게는 너무 짧아서 답답할 때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끈의 길이는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
서로 미치도록 갈망하여
그 끈을 자꾸 더 짧게, 짧게 하더라도
자신의 다리가 두 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다리는 두 개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지구상의 모든 불빛이 꺼지는 것처럼
암울하고 슬프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지구가 사라진다.
결국 내 안의 방이 한 개든
여러 개든 그 주인은 나다.
사랑의 근본은 타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다.
가끔 앞뒤 가리지 않고,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사랑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그 사랑 역시 무의식의 바탕에
자기애가 깔린 것인지도 모른다.
4. 사랑에 머물다.
사랑은 창호지에 천천히 스미는
아침 빛인지 모른다.
어둠이 지나고 밝아오는 빛을
은근하게 받아들여,
방 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이런 빛은
튀지 않으며 거북스럽지 않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잠시 스치는 바람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삶 자체일 때도 있다.
인간이 사는 데 있어,
사람이 5대 영양소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생명을 유지시키는 필수 영양소일 때도 있다.
사랑이 어느 날 사라졌을 때,
삶의 근간이었던 창작의 에너지 역시
시간 밖으로 사라졌다.
집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하는 건축물이지만,
그건 반쪽의 진실이다.
집은 사람의 온기를 받고,
손길이 닿아야 집다워진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는다.
한때의 불같은 열정의 순간이 지나면
원숙하며 은은해져서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따스한 손길과 마음이면 된다.
사랑에는 전문가가 없다.
타인의 눈에서 품격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내 사랑에 타인이
손대는 건 싫어하면서,
타인의 눈을 박는 것은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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