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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산문집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_전경린 #여행 에세이

by 메멘토모리:) 2024.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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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 저자. 전경린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 단편 <염소를 모는 여자>로 제29회 한국일보문학상,

1997년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제2회 문학동네 소설상,

1999년 <메리 고 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제3회 21세기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2>,

<열정의 습관>, <첫사랑>,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과

어른을 위한 동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가 있다.

 

 


 

 

네팔의 상징은 크게 히말라야산맥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그리고 링감(남근)과 요니(자궁) 숭배인데, 돌아와 생각하니,

우리의 현세 삶이 자연과 링감과 요니가 꾸는 꿈속이 아닐까 싶어 진다.

생의 이 모든 것이 은유에 불과한 창백한 헛것이고···

우리의 정체는 먼지 가득한 한 움큼의 허공이 아닌다.

지인들이 말하기를 요즘 내게서 서늘한 야생적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아마도 삶과 죽음과 애욕과 운명을 향해

활짝 열린 네팔의 힘일 것이다.

이제 쉰일곱 개의 불꽃 접시를 밤의 강물 위에 띄워 보낸다.

이 불꽃 접시 중 몇 개는 부디 당신의 수로로 흘러들어

가장 깊은 상념의 끝까지 가 닿기를 ······.


 
 

 
 

< 운명에 관한 제안 >

 

청춘이, 그것이 지나간 것이다.

 

참 길고 길었던 허열과 같은 청춘이 정말로 지나간 것이다.

 

청춘을 보낸 감상은 쓸쓸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청춘의 복무가 끝났으니,

적어도 이제 혁명과 발견을 위한

해일과 같은 난폭하고 무모한 요구들은 가라앉은 것이다.

 

바다가 빠져나간 갯벌처럼

생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 다정하고 쓸쓸한 기시감.

 


 
 

 
 

< 아직 트렁크 속에서 >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의 감정도 꼭 그랬을 것만 같았다.

어찌어찌하는 사이에 어떤 빚에 떠밀리듯,

심청이가 심봉사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팔려가듯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닐는지.

정말 나는,

그 무슨 대가를 치르기 위해

새벽과 저녁 사이의 흐릿한 박명 속을

이리도 헤매고 비약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삶 속에서 나는 마음보다, 말보다,

오히려 몸을 통해 그때그때의 진실을 확인해 왔다.

내 몸은 이곳에 있다. 내 진실도.

밤은 비린내가 나도록 낯설고,

너무나 길었다

 

 
 

한순간으로 충분한 것이 있다.

쿠마리 사원에 들어서는 것도 그런 일 일 것이다.

한순간에 그 귀기가 고스란히 몸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ㅁ자의 공간으로 들어섰던 그 괴괴한 순간을

나는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외롭고 괴롭고 허무하고 아프고 슬프고 무서울 때에···

 


 
 

 
 

어디서나 젊은 아가씨들은 아름답다.

 

2층 창가에 앉아 후궁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빗는 처녀도,

 

친구의 손을 잡고 좁은 현관문에 어깨를 부딪치며

튀어나오는 발랄한 처녀도,

 

빛깔 고운 사리를 두르고 다알리아를 들고

신전에 푸자 하러 가는 처녀도,

허드레옷을 입고 물을 길어오는 처녀도,

양지에 모여 앉아 조잘대며 레이스를 뜨는 처녀들도 ······.

 
 


 
 

 
 

| 나쁜 샤워기로부터의 깨달음 |

내 삶의 불행은 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불행이며

동시에 백 퍼센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란 걸 안다.

나의 비약적이고 배타적인 영혼 ······.

그런데도 내 영혼에게 다른 덕목들을 억지로 요구할 수 없다.

그저 내 영혼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반쯤 열린 손아귀와 방심한 눈빛······.

열심히 사는 것조차 때로 탐욕으로 느껴지고,

승화할 수 없는 맹목적이고 지상 위의 것에 불과한 열심은

모멸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지상을 넘어서는 표적이 아니면,

내 영혼에 자극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고통의 7할 이상은

현실 때문에 생겨나고 언제나 현실에 눌려 허덕이는 꼴이니,

이제는 삶에 승복하고 현실을 돌보아야 할 텐데 ······.

 

 
 

 
 

| 공포 |

 

글을 쓰면서 삶을 사는 것은 두 겹으로 질기게 사는 것인 동시에,

반대로 뭉텅뭉텅 부재의 빈 줄들을 남기며 사는 것이다.

 

 

삶을 사는 동안 치열하고 산만하게 가동되는 글쓰기 의식,

그리고 삶을 씹어 삼키며 무력한 자세로 글을 쓰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부재와 실종.

 

삶을 격리시키고 생의 시간을 반납하고,

마치 지하로 끌려 들어가 버린 듯,

행방이 묘연하니,

 

 

글쓰기와 삶 사이는 참으로 고독하고 무섭다.

 

 


 
 

 
 

| 나 무엇이 되어도 좋아 |

나의 법은 무엇인가?

무엇에 순응할 것인가?

나를 무릎 꿇릴 그것은 어디에 있나.

나는 어떻게 질 것인가······.

산책이 끝나는 강가에서 나는 저절로 알게 된다.

미리 구하지 말아.

돌아가서는, 나 무엇이 되어도 좋아 ······.

단지 내 삶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살아지지가 않아요.

정말 살아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니 내가 전원을 꽂고 살아 주는

가전제품 같기만 해요. 세탁기처럼, 냉장고처럼...

 

 

여자들의 탄식 소리가 떠오른다.

 

우리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개미처럼 끊임없이 삶의 틀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삶은 어디로 빠져나가 버리고 껍질만 이렇게 수북할까...

한 방 가득 눈물겨운 양파를 까놓고

집에는 없는 삶을 찾아서 집 밖으로 나가 보지만...

 

 

삶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인생은 어찌해도 좋은 거야.

그 상황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밖에서든 안에서든,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뜨거운 곳이든 차가운 곳이든..

제대로 산다는 건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놓치지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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