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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by 메멘토모리:)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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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현대문학>, <풍장>, <어떤 개인 날>,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등···


황동규 시에 있어서 죽음은
끝도 아니고 정지도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삶을 고양시키고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다.

시인은 늘 죽음 언저리를 배회하고
죽음과 귀엣말을 속닥거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렇듯 성과 속, 일상과 예술, 범인과 위인, 마음과 풍경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의 유머와 통찰이
순간의 죽음을 엮어 온몸에 부닥쳐오는 영원의 감각을 탄주 해낸다.

시인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삶은 죽음이 타는 심지다.'




꿈도 부활이다.
상상력은 졸아들면서 더 진해진다.
체온이 떨어지면서 하늘이 더 새파래진다.
그 색깔이 오늘 약간 흔들렸다.
내일은 하늘 가득 풍성한 깃털 눈이 날릴 것이다.


#황해 낙조落照

'서방西方으로 간다'라는 동서양 말 모두 죽는다는 뜻이고
오늘 태안 앞바다 낙조는
서쪽으로 갈매기 한 떼를 날리며
바다 위에
한없이 출렁이는 긴 붉은 카펫을 깔았다.
죽을 땐 그 위를 걸어
곧장 가라는 뜻이겠지.
저고리와 고름 채 안 보이지만
하늘이 붉은 치마 반쯤 풀고
카펫 하도 황홀히 출렁여 정신없으리.
제대로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멍하니 발길 멈추리.
두 세상 사이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쨍한 사랑 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해,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해마海馬

아무래도 나는 너무 환한 곳
사방이 물비누로 정갈히 씻은 본 차이나 같은
실하고 눈부신 곳으로 못 가리.
멸종 위기의 동물답게
막 어둡기 전 거리를 채 뜨지 못하고
짐말처럼 한 세상 터벅터벅 걸어온 다리는
동그랗게 오므리고, 고개 약간 숙이고
겨울 저녁
뿔뿔이 제 갈 길 가는 사람들 위에 나직이
잘 뵈지 않게 떠서
혹 아는 이를 만나면 숙인 머리를 더 숙이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나
가볍게 떠돌 리
느린, 늘인 걸음으로.


#속이 다시 부서지는 소리

뱃속의 책 가득 채우고
인간의 품에 안겨 들어와
탁자 위에 속 다 토해놓고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누런 종이봉투
모르고 밟으니 그냥 종이 것이 아닌
그냥 비어진 것이 아닌
무언가 속이 부서지는 소리.
이게 무슨 소리?
봉투 속을 조심히 부풀렸다가 다시 밟는다. 파지직!
한번 찼던 속 다 비워지고
이젠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 부서지는 소리,
누군가 속을 다 내주고도.


#밤 여울

아주 깜깜한 밤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마음속의 온통 역청 속일 때

하늘의 별 몇 매달린 밤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이 더 살갑다

두 눈을 귀에 옮겨 붙이고

더듬더듬 걷다

갈림길 어귀에서 만나는 여울물 소리,

빠지려는 것 두 팔로 붙들려다 붙들려다

확 놓고 혼자 낄낄대는 소리.

하늘과 땅이 가려지지 않는 시간 속으로

무엇인가 저만의 것으로 안으려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는 소리.


#몸 가진 것이면

지옥이 초대형 용광로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 얼어붙은

그 속내가 지옥이 아닐까?

허지만 잇몸에 임플란트를 세 개 박고

타이레놀 힘이 떨어진 한밤

화나게 일어나는 아픔을 눅이다 보면

역시 지옥은 불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몸 가진 것이면

유리 분자 사이로 빠진다는 바이러스도

지상에서 가장 나이 든 바위 편마암도

정곡 찔리면 타는 빛처럼 아프리.

빛의 송곳 끝에

몸 분자의 느낌 하나하나가 생생해지는

이 접점接点.

우주 저편 어디엔가는

이 지상의 것과 정반대 되는

마이너스 존재들이 산다던데

이 접점 아픔의 마이너스 존재는 무엇일까?

혹시 무한대 허공 같은 것....


#권진규의 테라코타

흩어진 추억을 조립해 본다.

대학병원서 조립 막 끝내

인골人骨이 배냇짓했다.

가랑비 속을 전람회에 선보일 테라코타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권진규가 미아리 집을 떠나

대학병원 앞을 거쳐 전람회장으로 오고 있었다.

경복궁 뒤론 선명한 무지개.

리어카 짐들이 무지개 보려고 목을 빼고

두상頭象 하나가 벙긋 솟았다.

눈을 밖으로 곧바로 뜨고 앞을 보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

인간 속에는 심지가 있는가

상처가 있는가?

두상이 더 오르려 하자 권진규가

얼른 목에 끈을 맸다.

권진규가 테라코타 되었다.

속이 빈 테라코타가

인간의 속에 대해 속의 말을 한다.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


#얕은

얕은 술 마시고 잠들면
얕은 잠에 들지만
이제는 얕은 잠마저 거하다.
온갖 슬픔이 다 모여드는
살면서 잘못 식탁 밑에 떨군 숟가락까지 보이는
깊은 꿈은 슬프다.
오늘 벌써 12월 15일 영하 8도의 아침
베란다의 꽃들은 오래전에 다 지고
한구석 볼품없는 화분에
새끼손톱만 한 이름 모를 하얀 풀꽃 한 송이가
아래 줄기를 모두 말리고
파란 숨기운만 반 뼘 남긴 채 피어 있다.
이 꽃 한 송이만큼의 잠이면 족하다.
이제 꽃받침까지 바싹 말라 오리.
얕은 꿈, 얕은 슬픔, 얕은 숨기운마저 밑동까지 마르면
어느 저녁, 고개 숙인 수술들을 다 깨워
오래 알고만 지내던 뿌리의 입김과
초면으로 만나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묻은 이슬방울까지
흘러내리다 꽃 뒷등에 잠시 동그랗게 멈춘
이슬방울까지 선명한
마당 함박꽃의 한창때를
그냥 모르고 지나쳤다.
벌들이 파고들어
꿀과 꽃가루를 온통 뒤집어쓰곤 했다.
꽃가루에 취해
갈 길 잊은 놈도 있었겠지,
제 이름이 꿀벌이라는 것도.
그럼 날자, 엉뚱한 하늘로 뛰어들어,
날자, 없다 치부했던 날개를 펴고.

컷 cut!

엉뚱한 하늘!
다른 무슨 생시가 어디 다시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복수초와 수선

후줄근한 마음 어디에고 걸 수 없을 땐

시인 안도현의 식전食前 산책길에

내소사 뒷산에 골라 캐어준

복수초와 수선에 걸리.

검은 비닐봉지 속에 맥 놓고 늘어져

길 밀리는 고속버스에 실려 와

주인이 혼곤해 이튿날 화분에 심긴 것들,

물을 주어도 흙 위에 쓰러져 꼼짝 않더니

하루 지나니 예가 어디지 고개를 들고

그다음 날 물 줄 때는 세수까지 했다.

며칠 후 복수초 꽃은 막 지고 있고

수선 셋 중 하나엔 꽃대궁이 고개를 내밀었다.

노자老子가 와보면 대번에 치우라고 하겠지만

지금 사람에겐 그것도 꿈이라

벌 나비가 오지 않아도 꿈이라

살다 속이 좁아진 시인에겐

한번 쓰러졌다 일어난 건

그 어느 것도 다 제 명命 지닌 꿈이라.


#어느 난蘭의 데스마스크

낮에 잠깐 품었던 잠이 깬다.
어디 딴 세상 소리처럼 트럭 경음 들리고
무언가 메마른 것이 몸을 적신다.
우박이 내리는가
모르는 사이 베란다 쪽이 어두워지고
유리창이 자못 소란스러워진다.
베란다 화분에 빈 심지로 꽂혀 있는
며칠 전 죽은 난, 마른 줄기들.

깨긴 깨었는가?
베란다의 소리 적이 가라앉고
소리 줄어든 만큼 주위가 훤해지고
화분 위엔 전에 못 보던 다리 긴
발 약간씩 뒤틀린 새들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는
자코메티 풍의 꼿꼿한 새들,
천천히 고개 든다.

고개 들면 어디로 가겠는가?
유리창 소리 가시고

베란다가 환해진다.
햇빛 드는 화분 위엔
꼿꼿이 삭는 심지의 촉루,
그래 어디로 가겠는가?
어디로?
갈 데 없는 난의 얼굴에
갈데없는 인간의 얼굴을 부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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