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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슬프지만 안녕' 황경신 #소설집_ 삶과 사랑과 세상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

by 메멘토모리:)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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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안녕
 

 
 

 
 

글. 황경신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부터 월간 <PAPER>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같은 세상>, <모두에게 해피엔딩>, <초콜릿 우체국>,

<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등의 책을 펴냈다.

 
 

 


 

 

사진. 김원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프랑스로 이 년간 그림 공부를 하러 다녀왔다.

 

인쇄 매체를 통한 독자들과의 교감에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어,

1995년에 월간 <PAPER>를 창간하였고

십일 년째 <PAPER>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가 담겨 있는' 사진을 찍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황경신은 그림쟁이다.

 

그녀 또는 그로 시작되거나 남자 혹은 여자로 번져나가는 그림 속에선

그들의 대화나 상념 혹은 묘사를 위해 소요되는 시간조차도 멈춰 있다.

 

세상의 공간을 차지하며 삼차원으로 배치되어 있던

사물과 사건들은 평면으로 분해되어 정해진 위치에 붙여진다.

 

바흐나 모차르트 혹은 헤비메탈이 흐르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황경신의 글에서는 음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이차원 속에 얼어붙는다.

 

조각 그림을 맞추는 데 정해진 순서가 없는 것처럼

황경신의 글도 무순이다.

 

그런 무질서가 황경신의 글을 그림으로 이끈다.

 

황경신의 글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시도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1892년 작품인 <물랭루주에서>와

1894년 작품인 <인사하는 이베트 길베르>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

 

그저 머리맡에 한 점 그림 걸어 놓은 것처럼 그녀의 책을 펼칠 뿐이다.

황경신은 우리의 장식적인 삶을 냉정하게 비틀고 있다. 이 책에서.

 

 

- 김창완 가수 -

 
 


 
 
 

 
 

Nocturn

 

사랑 속에 이별이 존재하고,

봄 속에 겨울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의 약속 안에는 텅 빈 동굴과 같은 허무함이 존재한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가 그녀를 자꾸 휘청거리게 한다.

남자는 웃으며,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린다.

 

가을 속에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그들의 아름다운 뒷모습 주위로, 푸른 공기가 가득 고인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그녀는 마침내 남자의 팔을 살짝 잡는다.

 

누구도 불행해질 수 없는, 벅찬 가을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

또는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의 인생까지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그런 것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지갑에서 현금을 빼낸 후,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죄책감은 없다.

 

이것이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세상이 그녀에게 주지 않는 것들을 받아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받을 게 많아.

 

크리스마스이브잖아.

그러니까 이걸로 부족해.

 

 


 
 

 
 


 
 

 
 


 
 

 
 


 

가볍고 순간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완전한 것들을 구하기에는,

난 아직 너무나 미완성이고 부족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른 세계의 입구를 이미 들여다보았고,

거기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이 무엇인지 알아 버렸어.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그들이 왔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함이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이고 또한 기쁨이야.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면서,

동시에 완전으로 이르는 길을 알려 주니까.

 

하지만 너라면 흔쾌히 그곳으로 갈 수 있겠어?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이 고통스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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