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감성사전' 소설가 이외수.

by 메멘토모리:) 2024. 5. 15.
728x90
반응형

 
감성사전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물과 단어 2백 개를 작가 특유의 꼼꼼한 시각과 재치 있는 풍자로 풀이해 낸 감성사전. 표제 그대로 사물과 언어의 실체를 작가가 갖고 있는 감성의 특이함으로 해석해 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
이외수
출판
동숭동
출판일
2006.08.22


글·그림: 이외수

1946년 경남 함양 출생.

1965년 춘천교육대학 입학.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 어린이들> 당선.

1975년 世代(세대) 지에 중편 勳章(훈장)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강원일보에 잠시 근무.


<꽃과 사냥꾼>, <꿈꾸는 식물>, <개미귀신>,

<겨울나기>, <박제>, <장수하늘소>, <틈>, <들개>, <칼>,

<사부님 싸부님>,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황금비늘> 등.


#호롱

초가삼간 토담 벽에 펄럭이는 세월이다.

세월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이다.

어머니 귀밑머리에 스며드는 놀빛이다.

천 년을 침묵으로만 다스려 온

설렘의 불꽃이다.

겨울밤 심지가 타들어가는 아픔으로

피워 올린 그리움이다.

흥건한 눈물이다.


#방랑

아무런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일이다.

떠돌면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는 일이다.

외로운 목숨 하나 데리고

낯선 마을 낯선 들판을

홀로 헤매다 미움을 버리고

증오를 버리는 일이다.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을 간직하는 일이다.


#아침

집을 나서면 대문 바깥이 모두 적진이다.

이 세상 생명체가 모두 적군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단지 아침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에게 경배한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찬란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림자

빛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실체를

떠나지 않는다.

모든 형태동작을 실체가

갖추고 있는 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실체가 아무리 높은 신분을 가진 인격체라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 계급장까지를 반영해 주지는 않는다.


#불만

불연소된 욕심의 찌꺼기다.

성냥개비 한 개만 한 능력으로

대궐만 한 집을 지으려 드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의

진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가열되면 증오로 변하거나

배반으로 변한다.

그러나 불만이 없으면 개선도 없다.


#자살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명확히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서의 경거망동.

생명체로써의절대 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


#굶주림

인간을 가장 비굴하게 만든다.

인생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인격을 가장 비천하게 만든다.

자신을 동물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죽음보다 잔인한 형벌이다.

그러나 현자는 육신의 굶주림을 통해

정신의 배부름을 얻음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보여준다.


#불행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 나무만 한 크기의 그늘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를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개

을 넘고 싶은 소망이

날개를 가지게 만든다.

바다를 건너고 싶은 소망이

날개를 가지게 만든다.

인간은 육신의 날개는 없지만

영혼의 날개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한평생 자신에게

그런 날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산다.

욕망에 눈이 가리어져 소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법

인간이 만들어 낸 법과

신이 만들어 낸 법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법은

만물을 구속하고

이 만들어 낸 법은

만물을 자유롭게 한다.

법은 죄인을 잡아들이는

심판의 올가미가 아니라

양민을 보호하는 자비의 울타리다.


#무지

자신의 허상에 가리어져

자신의 진 체가 보이지 않는 상태를

무지라고 말한다.

무지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보다는 타인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속물근성생활철학으로 삼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난보다는 몇 배나 더 무서운 인간의 적이다.


#기저귀

인간으로서의 체통과 동물로서의

생리적 현상 사이에서 탄생된

유아용 휴대식 개인 전용 화장실.


#세대 차이

세대와 세대 간의 문화에 대한 견해 차이다.

관심 대화에 의해 좁혀지고

아집 편견에 의해 멀어진다.

좁혀지면 사랑이 싹트고

멀어지면 미움이 싹튼다.

연령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좌우하는 것이다.


#잡초

인간들에게 비위를 맞출 줄 모르는 풀들을

통 들어 잡초라고 일컫는다.

꽃이나 열매는 볼품이 없지만

생명력만은 어떤 식물보다도 끈질기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잡초를 뽑아내지만

인간들보다 먼저을 차지한 것도 잡초였고

인간들보다 먼저 을 키운 것도 잡초였다.


#수세미

걸레는 죽어서도 걸레가 되는 꿈을 꾼다.

죽어서도 걸레가 되는 꿈이

수세미의 씨앗을 눈 뜨게 한다.

수세미는 온 세상을 닦아주고 싶은

소망으로 매달려 있는 초록빛 걸레 뭉치다.


#결혼

사랑에 대한 착각을

최종까지 수정하지 않은 남녀들이

마침내 세월의 함정 속에 공동으로 투신하는 사건.


#실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의 칼을 맞고

피 흘리는 영혼으로 절망의 터널에

내팽개쳐지는 상태.

믿음백지화되고

소망거품화되고

사랑사막화된 상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되찾음으로써

홀로 비탄의 강물 속에 수장되는 상태.

사랑과 증오의 전환점.

그러나 이성 간의 전형적인 사랑은

대개 실연까지가 그 사랑의 완성단계다.


#일기장

이 하루 종일 시간에

멱살을 잡혀 끌려다닌 흔적들을

날마다 문자로 정직하게 실토해 놓은 고백록.


#도자기

담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살림도구가 아니라

비우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예술품이다.

그 속에 일월이 뜨고 지고

그 속에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그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음을 안다.


#새치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에 섞여 있는

소수의 은빛 머리카락.

젊음이 다했다는 경보 신호.

노인이 되기 위한 부분 예행연습.

세월의 또 다른 흔적.


#새벽

매복하고 있던 어둠이 은밀히 살해당하고

빛의 첨병들이 낮은 포복으로

진군해 들어오면 새벽이다.

사무들이 어둠의 포박에서 풀려나와

조금씩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면

청소부들이 살해당한 어둠의

부스러기들을 비질하고

도시는 나지막하게 기침을 하며 잠을 깬다.

시간청명하게 세척되어 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바로 이 시간에 남을 위해 기도한다.

신이시여, 영혼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도

당신의 새벽이 오게 하소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