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곰팡이> 신경희 지음_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오랜 날의 꿈, 슬픔이 떼 지어 다니는 세상에 시詩를 만나러 떠나는 구도의 여정!
- 저자
- 신경희
- 출판
- 문학나무
- 출판일
- 2011.12.20
▶신경희
63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바다를 끓이다>, <푸른 그늘 속 붉은 꽃잎들>···
#핸드폰이 아프다
엘지 병원 나동 대기실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무음 무색의 핸드폰을 들고
표정 없는 얼굴들,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호명이 되고 검진이 시작되었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인식 오류'
오랫동안 너무 많은 것을 담았던 핸드폰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핸드폰은
병들어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성과 감성과 육성으로
모든 것들을 대신하던
핸드폰은 온전히 사람의 모습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빌딩 숲에서 전원이 산다
전원 빌딩이라는 이름을 가진
빌딩 숲을 지나가 보면
길모퉁이 전원을 펼쳐놓은 할머니
푸르고 누르고 붉은 야채와 열매 과실들
푸르른 전원을 만나는 것이다
전원 빌딩 숲을 지나다 보면
교차로에 켜진 푸르고 붉은 신호등은
과수원에 주렁주렁 매달린 과실이 되는 것이다
도시 한복판에 주르르르 떨어지는
푸르고 붉은 열매들을 꿈꾸는 것이다
전원 빌딩 숲을 지나다 보면
할머니의 이마에 불어오는 깊게 팬 밭고랑엔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빌딩과 빌딩이 사는
전원 빌딩 숲을 지나다 보면...
#어머니는 입덧 중이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하얀색과 노란색 멜론 여섯 개
배꼽엔 탯줄 같은 꽃잎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태아로 어머니를 만난 날
그 연약한 꽃잎이 커다란 열매들을 키워왔던 것이다
어머니 배꼽에 맺혔던 꽃
한참을 바라보다
나의 유전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그 꽃이 나를 키웠다고 생각하니 배꼽이 간지러워졌다
어머니와 내가 태아로 만난 날
어머니는 입덧 중이었다.
#그녀는 붉은 수액을 뽑는다
당신은 거기서 환한 꽃으로 피어나고,
그녀는 붉은 수액을 뽑는다.
금속성 바늘이 혈관을 통과해
진공튜브 유리관 속 붉은 수액 흘러들고 있다
진공튜브 유리관 속에 흘러든 체온,
이제 곧 응고 되어 식어갈 것이다
싸늘한 유리관 속에 분리되어 층을 이루는
그녀의 내력들을 읽어낼 것이다
온기가 남아있는 붉은 수액들은 뿌옇게 김에 서리고
뿌연 유리관 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봄빛으로 환한데,
흰가운을 입은 창백한 얼굴들 스치고 있다
42번 43번 44번 대기 번호들에 차례차례 불이 들어오고
대기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호명된다
생을 움켜쥐듯 대기번호들 손에 꼭 쥐고 있는 사람들
종소리 쉼표처럼 울리면 숫자들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제 곧 너와 나의 이름도 불리어지겠지
호명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너와 나의 푸른 대합실
노란 링거액을 매달고
휠체어를 탄 봄이 굴러가고 있다
#봄이 아프다
K-16 미군 기지 커지는 소음
전투기가 이륙하고
아파치헬기가 뜨고 내린다
들녘에 생명들이 피어나고
세상은 환한데
갈아엎어 놓은 황톳빛 대지
절규하는 대푸리 마을 사람들
마지막 자존의 씨앗을 심는
들녘의 사람이 되어 울어주는
조상의 뜨거운 피가
불꽃으로 피어나는 곳
봄이 오고
땅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텃밭에 감자를 심는
대추리 마을 사람들
#튜울립-사랑고백
난 사랑이죠 당신의 사랑이죠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당신의 사랑이죠
당신의 사랑 안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당신의 사랑이죠
사나운 바람 불어와 흔들지라도
거친 절망의 바위에 부딪힐지라도
그 상처로 견고해지는 당신의 사랑이죠
난 물결이죠 난 장신의 물결이죠
당신의 사랑 가득 싣고 흘러가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꽃물결 이루는
물살을 거스르다 다친 상처로 아플지라도
홀로 상처 안고 스스로 깊어지는 물결
난 물결이죠 난 당신의 물결이죠
당신에게로 흘러가 환하게 미소 짓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난 사랑이죠 당신의 사랑이죠
#그녀의 生, 엔딩 자막이 흐르다
그녀는 낮은 강에서만 사는 물고기였다
그녀는 한 번도 실개천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다
살구꽃이 피던 텃밭 모퉁이에 노란 수건을 쓰고 앉아
生의 한 철 길고 긴 줄의 詩를 피우고 지우는 동안
검은 호랑나비는 너울너울 그녀의 어깨 위로 날아갔다
'고장 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삽니다'
그녀의 삶, 엔딩 자막이 흐른다
가뭄 속에 몸부림치던 흑거품 사각의
흑백 화면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제 다시는 부팅되지 않는 희미한 그녀의 삶,
사각의 어둠 속에 갇히고 있다
꽃봉오리의 그녀,
세찬 바람에 만개하여 흐트러지는
누구도 그 꽃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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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쓴 詩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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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 꽃
어머니 방을 치우며
어머니의 비늘을 줍는다
꽃가루 같은 어머니의 비늘들
탄력도 광택도 없이 바래어
보랏빛 매트에 하얗게 피어있다
거친 물살을 가르며 돌아와 누운
生의 자리에
피워 올린 비늘 꽃
등 푸른 내 비늘 위에
봄볕 환한 거리에
하얗게 피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