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작가 최숙희·그림 권신아 <그대가 끝나는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랑보다는 깊이를 알 수 없지만 표현하는 사랑에 감동받는다_시, 그림, 산문
- 저자
- 최숙희
- 출판
- 명상
- 출판일
- 2000.01.31
《 작가 최숙희 》
저자는 오랫동안 MBC 라디오 작가로
일해 오면서 많은 사랑과 이별을 보고 느끼고,
그 사연들을 세상에 흘려보내며 많은 사람들과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나누었다.
그중에서 주옥같은 사랑의 언어만을 모아
시, 그림, 산문집으로 펴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한 번쯤
저자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다.
저자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 창작학과를 졸업했고,
현재는 두 번째 작품을 집필 중이다.
《 최숙희의 프로그램 》
▶ MBC 라디오
백분쇼·두시의 데이트·지금은 라디오 시대
밤의 디스크 쇼·별이 빛나는 밤에
▶ 텔레비전
SBS 이주일의 '투나잇 쇼'
인천 방송 '3일간의 사랑'
EBS 교육방송 '아름다운 세상, 커다란 꿈'
▶ 그림· 권신아
[ 활주로 ]
너에게로 가는 길,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전
긴 활주로는 날기 위한 절대적인 땅.
내게도
너에게로 가기 위한 긴 활주로가 있었다.
너에게로 날아가기 위한 긴 시간이 있었다.
이제
비행기는 착륙을 위해
땅 위에 멈춰 서기 위해
또 한 번의 활주로를 필요로 한다.
내게도
너의 앞에 멈춰 설 수 있는 활주로가 필요하다.
너에게로 도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땅이 필요하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긴 활주로를 달렸었고
이젠 무사히 내려앉기 위해, 멈춰 서기 위해
내겐 활주로가 필요하다.
너의 마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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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엽 감는 강아지 ]
어른이 된 후 지금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강아지 인형은 과연 행복했을까?
나의 배려를 배려라고 생각했을까?
귀찮고 신경이 쓰여서 누군가에게
보내 버린 거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태엽이 감기지 않아도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그럼, 난 정말 강아지 인형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그 인형을 주었던 것일까?
내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난 정말 그 태엽 감는 강아지 인형을 사랑하고 아끼기는 했던 것일까?
사랑하는 만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에게 나의 사랑을 보내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난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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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가 ]
작은 상자 안에 그의 몸이 구겨져 들어간다.
요가의 대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자기의 몸을 맘대로 접었다 폈다 말았다 한다.
유연한 그의 몸을 보고 있으려니 나의 몸에 관심이 간다.
일어나 손바닥으로 땅 닿기를 해본다.
근육이 당겨 오고 찌릿찌릿 전기가 오는 듯하다.
가슴과 무릎 닿기도 안 된다.
점점 굳어 가고 있다.
몸이 딱딱해지고 있다.
요즘엔 내 마음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어 보고 싶은데
그냥 덤덤하기만 하다.
기쁜 일로 배가 아프도록 웃어 보고 싶은데
그냥 피식 웃고 만다.
점점 굳어 가고 있다.
마음이 딱딱해지고 있다.
슬퍼진다.
내 몸과 내 마음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했던
어리석음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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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과 초상화 ]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자화상과 초상화.
내가 나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한 점과
다른 누군가가 내 모습을 그려 준 초상화 한 점.
두 그림의 주인공은 모두 나인데
그림의 크기도
그림의 표정도
그림의 색깔도 다릅니다.
내가 그린 나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그린 나의 모습이 참 많이도 다릅니다.
혹시 자화상에 그려진 내 모습이 더 근사하지는 않은지,
혹시 초상화에 그려진 내 모습이 더 초라하지는 않은지,
두 장의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가 오늘 밤
그 주인공들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자화상과 초상화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내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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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스틱 ]
그녀가 바른 립스틱 색깔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똑같은 립스틱을 사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발라도 그녀의 입술색과 같아지지 않는다.
진하게도, 옅게도 발라 보지만 소용이 없다.
며칠 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이유는 나에게 있었다.
똑같은 립스틱을 발랐는데도
사람마다 다른 색을 띠는 이유는
원래 가지고 있는 입술 색깔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입술 빛과 그녀의 입술 빛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래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립스틱이 그녀와 내게 다른 색이 되고
다른 의미가 되는 것처럼
똑같은 그도 그녀와 내게 다른 색이 되고
다른 의미가 된다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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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
난 그에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냥 지나치는 일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아니, 그의 하루의 시작과 끝이 되고 싶었다.
그의 일상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지하철에서 마지막 선물을 샀다.
그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올 수 있는
650원짜리 네모난 지하철 패스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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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보험금 몇백만 원에 아들의 손가락을 잘라 버린 아버지.
말하지 않겠다고 한 아버지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10살짜리 아들 ...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는데
가난은 죄가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이라고 했는데
속 깊은 아들은 손가락 없이도 다니는 사람을 많이 봤다며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고,
가난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세상이 자꾸만 거꾸로 간다.
어지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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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수증 ]
물건들의 바코드가 입력된다.
하나씩 찍힐 때마다 작은 모니터의 숫자가 올라간다.
영수증을 받는다.
거짓 없이 내가 산 물건들의 목록이 줄줄이 적혀있다.
내가 건넨 돈과 거스름돈까지 틀림없이 적혀있다.
내 인생을 바코드에 입력하면
어떤 목록들이 줄줄이 적혀 나올지
무엇을 지불하고 무엇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문득 내 인생의 영수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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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링 ]
열 개의 볼링 핀을 향하여 하나 둘 셋
스텝에 맞춰 공을 힘차게 굴립니다.
공을 놓는 그 순간의 팔의 각도와
손목이 휘어진 각도에 따라 공은 굴러갑니다.
나는 항상 똑바로 굴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은 똑바로 가다가도 중간 어디쯤에서 방향을 틀어
내 휘어진 팔의 각도만큼
거짓말하지 않고 휘어져 굴러갑니다.
결국 하나의 핀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샛길로 빠지고 맙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똑바로 가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나의 팔이 휘어진 만큼 가는 것.
우리 인생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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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우산을 들고 지나간다.
비도 안 오는데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돌러본다.
가방 밖으로 삐죽하게 나온 우산들이 보인다.
불안해진다.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이방인 같다.
일기예보가 빗나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계속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맑은 날
우산 들고 다니는 사람들 틈 속에 우산이 없는 난
끝까지 이방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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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구 ]
'비상구'
평상시 닫아 두었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면
급히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출입구.
변화 없는 하루하루가 미치도록 지겹다.
다른 모습의 나를 만나고 싶다.
일이 너무하기 싫다.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냥 죽어 버리고 싶다.
나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 위급한 상황
하지만 비상구는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