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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최갑수 |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1997년 계간 <문학동네>에 시 '밀물 여인숙'을 발표하여
등단했으며 시집 <단 한 번의 사랑>을 펴냈다.
오랫동안 신문과 잡지에서 여행 담당 기자로 일하다
지금은 프리랜서 여행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여행 산문집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구름 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
<목요일의 루앙프라방>을 펴냈다.
여행은 지금까지 경험하던 시간과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라고, 그 시간 속에 슬며시
심장을 올려놓은 일이라 믿고 있다.
골목길을 거닐며 삶이란 시계를 내려놓는다
느리게 쌓인 먼지와 기억, 따듯하게 흐르는 시간의 조각들
그대로여서 반갑고,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마운 골목 산책
산토리니의 골목길은 아름답다.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산동네를 얘기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차도 오르지 못하는 좁고 경사진 골목은
그 생성의 과정이 산토리니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아마도 그건 트라우마처럼 심장에 각인된
고통과 가난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애환을 경험하지 않은 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골목길은
분명 껍데기일 수 있다.
최갑수 작가의 섬세한 시선은 그 간극을 메운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페이지들을 넘기며
나는 내가 굳게 신뢰하는 명제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길은 좁을수록 좋다.
시간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다.
그리고 삶은 본디 골목길을 닮았다.
- 오영욱 건축가 [오 기자, 여행을 스케치하다] 저자 -
# 골목에서 만난 ••• 스쿠터
약간은 느리게,
하지만 너무 느리지는 않고
두리번거릴 수 있을 정도의 속도.
골목을 여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속도다.
당신에게는 말 잘 듣는 나귀를 닮은
스쿠터 한 대가 필요할 듯.
그 녀석과 함께 토요일의 골목을 다니다 보면
인생에 느긋한 태도를 가지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 골목에서 만난 ••• 구멍가게
구멍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세계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구멍가게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적당한 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곳도 구멍가게다.
# 골목에서 만난 ••• 철학관
골목에는 유난히 철학관과 점집이 많다.
어느 골목에서 주민에게 왜 이렇게
점집이 많은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도 어딘가 하소연할 데가 있어야 할 거 아니요.
동사무소에 가봐야 우리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점쟁이는 골목 사람들의 친절한 카운슬러.
# 골목에서 만난 ••• 연탄
연탄은 구멍마다 품고 있었던 다정함으로
골목의 방들을 밤새 데웠을 것이다.
새벽의 연탄.
허기와 갈증으로 앙상한 육체.
나는 지금 일생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한
한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보고 있다.
# 골목에서 만난 ••• 지붕
그저 바라볼 수밖에는 없다.
미련 없음에 대해 더 이상 미련 없다고
미련 없이 말하는 이 속수무책.
가끔 아무런 감정 없이 비좁은 하루가 간다.
이제 곧 어느 집 가난한 지붕으로부터 저녁이 시작될 것이고
우리는 또 내일을 버티려고 할 것이다.
# 골목에서 만난 ••• 빨래
같은 모양의 옷걸이에 같은 간격으로,
같은 종류끼리 나뉘어서 내걸린 빨래.
빨래를 내건 사람은 섬세한 손가락을 가졌을 것이고
약간은 소심할 거란 상상을 해본다.
우리 삶을 설명하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듯,
한 가족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는 빨래 한 줄이면 충분하다.
# 골목에서 만난 ••• 이발관
이발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라는 고무줄은 아주 천천히 늘어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지구와 달의 회전과 무관한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웃는 날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그 무엇을 보내고 싶지 않을 때,
하지만 꼭 보내야 할 때,
1시간쯤 생을 외면하고 싶을 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찾아볼 만한 곳, 이발관.
# 골목에서 만난 ••• 카페
내 생은 가난하다.
저축도 없고 늙어서 받을 연금도 없다.
대부분의 돈은 여행하고 카메라를 사고,
자동차 연료를 보충하는데 다 써버렸다.
하지만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는다.
집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고,
도서관 옆에 자그마한 단골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카페는 오래 신은 운동화처럼 다정하고 편하다.
게다가 그 집의 킬리만자로 커피는 아주 맛있다.
걱정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단골 카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농담에 소질이 있는 것만큼이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용하다.
# 골목에서 만난 ••• 처마
비가 그치자 처마 밑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크래커처럼 바삭바삭했다.
처마 아래 서보니 처마는 사람의 턱 밑을 닮기도 한 것이어서
나는 손바닥 위의 새처럼 안도할 수 있었다.
처마 아래 맺혀 있는, 채 마르지도 않은 빗물은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한 말처럼 망설이고 있었고
바람이 흔드는 종소리는 지난밤 당신이
만지작거리던 몽상 같기도 했다.
당신의 턱밑은, 내가 서 있는 처마는
고요하고 섬세한 햇빛의 거주지.
세상의 모든 햇빛은 잠시라도 처마 아래에
머물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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