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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황주리_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것인가? #에세이 #책 추천

by 메멘토모리:) 202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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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좋아요
 

 
 
 

● 글. 그림 황주리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대 미대 서양화과와

홍대 대학원 미학과,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23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100여 회의 기획 단체전에

참가하였으며 1986년 석남 미술상과

99년 선 미술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중반 신구 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의 한 사람으로 떠올라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1987년 이후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더욱 심화된 문명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흑백 그림들과 설치 작업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도시적 상상력과 시적 감수성에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조형언어들은

글쓰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의 글은 일상의 겉과 속을

날카로우면서도 담백하게 드러낸다.

 

이때 그의 목소리는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쾌하기 이를 데 없어 절제된

지성의 기품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것인가

 

너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의 추억은 다 어디쯤 모여 살고 있을까

 

축제처럼 술렁이는, 옹기종기 모여 꼬물거리는,

술 마시고 사랑하는 너와 나의 초상들.


아버지. 맛있는 전복을 '실컷 먹어라' 하시던

당신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때는 그 비싼 전복을 실컷 먹어도 좋았다.

믿음직한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내 호주머니 속에 돈이 있다 해도,

왠지 전복은 비싸서 그렇게 실컷 먹을 수는

없을 듯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처럼 맛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 믿음직하던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꿈속에서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옜다' 하며 담배 한 갑을 내 방에 던져주시던 아버지.

 

비록 꿈이 아니더라도 나는 여기저기서 당신을 만난다.

맨해튼의 모든 길목에서, 트럼프 타워 앞에서,

그 옛날 당신의 별명이던 마천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그 옛날 당신의 연인이 그렇게 불렀다고 했던가, 마천루.

아마도 너무 높아 오를 수 없다는 뜻이었겠지.

 

마천루, 내 아버지.

생시에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오늘따라 많이 그립다.

 
 


 
 
 

너는 철도의 레일이다

녹슬고 얼룩이 진, 은빛으로 번득이는

아름답고 막연한 레일이다

그리고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오랫동안 죽음의 방식에 관해 생각해 왔어요.

누군가 적당한 때에 아무 고통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을 죽여준다면,

그는 정말 은인이지요.

문득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서른한 번째 자살을 도운,

어떤 미국 의사가 생각나네요.

요즘 세상에 누가 남의 죽음에 끼어들고,

간섭하고, 책임지고 싶어 하나요?

남의 삶이 그저 남의 일일 뿐이듯,

남의 죽음 또한 남의 일일 뿐이지요.


감기는 늘 휴가였다.

그렇게 아프면서 뿌리가 영글어가는

식물처럼 키가 자라는 느낌.

특히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는

너무 느슨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경고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산다는 것 자체가

가까운 사람들과의 멀어짐의 반복 아니었던가?

우리들의 가까운 이웃은 늘 푸른 나무처럼

변함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천국에는 새가 없다는데,

어쩌면 '나는 일'은 이 지상의

가장 고통스러운 업일지도 모른다.

서서 자는 말이 새의 잠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누구의 잠인들 편치만은 않으리라.


​사는 것이 참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나,

혹은 욕된 삶을 살고 있다거나,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양태의 삶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가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


​유서를 미리 쓰면 오래 산다는데,

진짜 유서 냄새가 나는 글은 쓰지 못했다.

유서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쓰는 장황한 편지를 쓰고 나자

우습게도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만 더욱 간절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래 살고 싶은가?

인체에 해롭다는 겨울 안개에 갇혀

가도 가도 끝없는 땅만 내려다보면서,

별 뾰족한 희망이나 절실한 절망조차

간직하지 못하면서···


영화에서처럼 사람은

그렇게 우아하게 죽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말을 남기는

계획된 임종은 드물 것이다.

긴 혼수상태 끝에 기진맥진 완성되는 사람의 죽음.

그 상황에서 현실적인 의식이나

고백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죽음은 드라마나 뉴스 사이의,

우리가 자세히 보지도 못하는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광고 필름이나,

한마디 농담처럼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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